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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글

스토아의 배신자인가 내부고발자인가? - 키오스의 아리스톤

by 구도은자 2024. 5. 10.

 

키오스의 아리스톤 ( Ἀρίστων ὁ Χῖος, Ariston of chios )

생몰 : 기원전 300년경 (추정)

학파 : 스토아 학파 (중퇴??)

 

 

스승과 논쟁하는 아리스톤
스승과 논쟁하는 아리스톤

 

 

키오스의 아리스톤은 기원전 약 300년 경에 그리스의 큰 섬 중 하나인 키오스 섬에서 밀티아데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장성해 아테네로 와서는 키티온의 제논의 연설에 감화되어 그가 세운 스토아 학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무렵 이미 대머리가 되어 많은 놀림을 받았다고도 합니다.  스토아 학파에 입문한지 오래지 않아 제논과 학술적 견해차로 대립하게 되어 스토아 학파에서 나오게 되고 그에 대한 반박과 키니코스 학파의 일부 가르침을 차용해 자신만의 학풍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키니코스 학파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시노사르게스에 학당을 엽니다. 아리스톤을 추종하는 일부 제자들은 그들을 스스로 아리스톤 학파라고 자칭하고 다녔으며, 이런 여러가지 상황 때문에, 스토아 학파 사람들은 아리스톤을 이단아로 취급했다고 합니다. 

 

 

 

  • 키오스의 아리스톤 소개:  키오스의 아리스톤(Ariston of Chios)은 키오스 섬 출신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서 윤리학과 도덕 철학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삶과 가르침은 다소 모호한 채로 남아 있지만, 그는 스토아 학파와 견유학파의 철학을 적당히 혼합한 듯한 철학 학풍을 가지고 있었고, 그 스스로도 제자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학문적 계보로 연유하건데 스토아 학파의 일원으로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 스승과의 대립: 아리스톤은 자연 일체의 덕과 논리학 전반을 연결하는 것에 대해 제논의 학설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최고법칙이 문답식 추론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다는 식의 설명을 거부하였으며, 수사학으로 점철되어 있는 논리학 전반이 최고법칙과 무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사유 전반 과정이 물리적 공간 개념에 귀속되거나 그것의 형태를 보인다는 제논의 학설에도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사유 전반 과정은 물론이고 최고법칙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물리적 공간과 완전히 독립된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과정의 구체적 설명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지금까지 약소하게나마 추론마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키니코스 학파의 의견과 상당히 유사하다 할 수 있습니다.

 

 

  • 금욕의 강조: 그가 스토아 학파이냐 키니코스 학파에 가깝냐를 논하기에 앞서 두 학파 모두 금욕주의 학파이므로 아리스톤 역시 금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건강이나 부 등과 같은 아디아포라(ἀδιάφορα)가 때에 따라 자연법칙에 기초한 선(善)에 합치할 수 있다는 제논의 주장과는 대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년에 그의 행적을 보면, 자신의 금욕법칙을 스스로 버리는 행동이 목격되는데, 아마도 노망같은 병환에 의한 것이 아닐까 의심되기도 합니다.

 

 

  • 유명한 제자들: 그의 학당이 스승의 학당만큼 유명하지는 못했지만, 스승 몾지 않은 유명한 제자들을 두기는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수학자로도 유명한 에라토스테네스나 같은 스콜라 학당에 있었던 아폴로파네스 같은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아리스톤은 스토아 학파 출신이지만, 오히려 학풍은 키니코스 학파에 더 가까우며 수사학에 매우 능했다고 합니다.  스승인 키티온의 제논과의 불화는 그가 스승의 논리 중에, 자연법칙에 기초한 선이 유일한 선이라는 것에는 동의했으나, 제논이 그것을 논리학과 물리학의 영역에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회적 관습과 가능한 모든 학문에까지 가능성을 확장하려는 시도 자체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선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윤리학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것이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자정작용이 되어 뒤에 기독교로까지 꾸준히 이어지는 스토아 학파의 학문성을 더욱 견고히 하는 내적충실에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후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도 꽤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유명한 키케로 역시도 아리스톤에 대해 평하며 그런 식의 평가를 내렸다고 합니다. 

 

 

아리스톤의 말년

 

금욕을 강조했던 아리스톤이 역설적이게도 그의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말년에는 쾌락 그 자체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를 싫어했던 스토아 학파 학자들의 증언도 아니고 그의 제자들의 증언이니 아마도 신빙성은 높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또한, 여담이지만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대 그리스 전반 철학자들의 야사들을 가장 많이 전하고 있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의하면 그가 대머리인 이유로 일사병으로 죽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아디아포라 ( ἀδιάφορα, adiaphora) 란?

 

스토아학파에 의해 형성된 개념으로, 선도, 악도 아니고, 명령 받지도 않고, 금지되지도 않은 것. 또는 무관심한 것.  로마시대 이후에는 신약 성서에서도 이용되어 기독교의 개념으로도 논의되게 된 명제입니다. 

즉, 스토아 학파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대상에 대해서, 세가지 등급으로 나누는데,
첫째가 좋음 (Good) ,
그리고 둘째가 나쁨 (Bad) ,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도 저도 아닌 규정하기 힘든 것들이 바로 아디아포라 (Adiaphora)  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피론 등의 회의주의 학파들에 대해 논할 때도 다시한번 설명될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