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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글

부자였지만 금욕의 삶을 살은 내적평화의 달인 - 키티온의 제논

by 구도은자 2024. 5. 5.

 

키티온의 제논 ( ΖήνΩν ὁ Κιτιεύς , Zeno of Citium )

생몰 : 기원전 334년 ~ 262년

학파 : 스토아 학파

 

키티온의 제논 - 스토아 학파의 창시

 

 

제논은 기원전 334년경 키프로스의 키티온에서 태어났으며,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아테네로 이주하여 메가라학파의 스틸폰과 키니코스 학파의 테베의 크라테스 등에게 철학을 배웠습니다.  그 중 특히 크라테스에게서의 가르침은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되어 키니코스 학파 (견유학파) 와 비슷한 삶의 방향을 지향하는 스토아 학파를 세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같은 금욕주의 학파이지만 견유학파와 그의 스토아 학파는 어떻게 추구하는 방향이 다른가를 알아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있는 철학적 탐구가 될 수 있습니다.

 

 

  • 키티온의 제논의 삶: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그의 생애와 이론은 당대와 그 이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적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조상은 페니키아 사람이라는 주장도 있고, 그리스 사람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키티온이라는 도시 자체가 다국적 인종이 많이 살았던 도시이기 때문에 그런 설들이 분분한 이유일 것입니다.  또한 그의 아버지인 므나세아스(Mnaseas)의 이름을 보면, 페니키아 어로는 '잊게 만드는 사람' 이라는 뜻이고, 그리스어로도 '마음챙김' 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기 때문에 더더욱 아리송한 면이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상인으로 큰 부자가 되었고, 이후에 크라테스에게 배움을 받고, 그 뒤에는 스틸폰, 크로노스, 필론 같은 메가라 학파 철학자들의 가르침도 받았으며, 그 뒤에는 또 플라톤 학파의 가르침을 받은 적도 있을 정도로 탐구열이 엄청났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스스로에게 체화하여 결국엔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 스토아 학파 창시: 스토아 학파는 도덕적 가르침과 내적 평화를 추구하는 철학입니다. 제논은 도덕적 원칙과 태도에 대한 이론을 개발했으며, 그의 철학은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스토아라는 이름은 그리스의 건축양식중 하나의 이름이며, 뒤에는 벽이 앞쪽에는 기둥과 함께 계단 밑으로 넓은 광장이 펼쳐지는 작은 복도형 구조물을 뜻합니다.  제논이 항상 아테네의 스토아에서 제자들과 그의 연설을 들으려는 사람들에게 강의했기 때문에, 이 학파의 이름이 스토아 학파가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금욕주의 학파이지만, 견유학파의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제도를 잘 따르고, 공동체의 의무도 잘 이행하였기 때문에, 차후에 로마의 세상이 되었을 때까지도 다른 금욕주의 학파나 쾌락주의 학파들과는 달리 그대로 살아남아 기독교의 교리에까지 일부 흡수되어 후세에 남게 되었습니다.

 

  • 다양한 분야의 철학연구: 제논의 철학은 그의 일부 스승들처럼 한가지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윤리학, 신학, 자연철학, 오리엔트 철학 등 여러가지 분야에서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당연히 다양한 철학사조의 스승들을 모셨던 영향이 컸으며, 특히 윤리학 쪽으로는 메가라 학파의 변증적 사고를 중요시해 인생의 목표인 행복을 위해서는 '로고스'(logos) 즉, 이성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필론 등의 스승을 통해 오리엔트 철학을 일부 흡수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자연과  일치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금욕주의 학파다운 피시스를 강조하는 전통을 세웠고, 견유학파의 영향으로 절제를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그는 우주 자체를 신으로 보는 범신론적 우주관(물리학) 을 가지고 있었으며, 크게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우주관을 많이 차용해서 에테르라고 부르는 신성한 불을 우주의 모든활동의 기초원소로 보았습니다.

 

  • 마땅한것 그리고 아파테이아:  제논은 제자들에게 일단 말하는 법을 가르치고, 그 뒤에 자연철학을 가르치고, 마지막으로 윤리학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결국 철학의 완성을 윤리학이라고 생각한 수순입니다.  제논의 윤리학은 크게 마땅한 것과 아파테이아로 대표됩니다.  제논은 인간본성의 궁극적 목적이 자연에 일치하면 사는 삶이라 하면서, 인간은 충동에 좌우되는 동물들과 다르게 이성 (logos)을 가진 존재이며, 이성에 따른 삶을 살기를 강조했습니다.  제논은 이러한 이성에 따른 삶을  '마땅한 것' (to kathēkon) 을 하면서 사는 삶이라 정의했습니다.  이는 '자기 수준에 맞는 적당한 것' 을 행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를 행하고, 형제와 친구들에게 성실하게 행동하며, 국가에는 충성하는 것 등이 모두 '인간' 으로서의 '마땅한 것' 입니다.  '마땅한 것'은 대부분 언제나 마땅히 해야 하지만, 가끔은 상황에 따라 '마땅한 것'임에도 언제나 해야하는 것은 아닌 것들도 생긴다.  이성의 가르침에 따라 이러한 것들을 잘 구분하게 행동하여 '비이성적인 감정의 충동'에서 벗어나 '평온'을 가져와야 하며, 이런 평온의 상태를 아파테이아(apatheia) 라고 부른다.  이를 좀더 첨언하자면, 제논은 '도덕적인 영역'과 '아무래도 상관없는 영역'을 구분한 것이다. 즉,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 쾌락과 고통, 아름다움과 추함, 강함과 연약함, 부유함과 곤궁함, 출생의 귀천, 정치적 이력 등은 모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기 때문에 무차별적인 것,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차별성을 두어서는 안 되며 그저 운명이 닥치는 대로 다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인 '도덕적인 영역'은 일종의 '의무(마땅한 것)'인 것이다. 가령, 삶에 대한 사랑,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자연적 경향에 부응하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 동포애도 사회적 본능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러한 경향에 부응한다. 따라서 결혼을 하고 정치적 이력을 쌓고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등의 모든 행위들은 인간 본성에 '마땅한 것'들이고 일종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마땅한 행위'의 특징은 그것이 부분적으로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데 있다. 그 이유는 그런 행위가 도덕적 의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행위는 부분적으로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 성공 여부가 우리의 의지에도 달려 있지만, 타인들, 상황, 외부 사건들, 나아가 종국적으로는 운명에도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의무(마땅한 것)'가 있음으로해서 그의 행동이 설혹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가능한 선택 내에서 최선의 선택을 제안하며 삶의 방향을 잡아 나갈 수 있게 해준다. 즉, 행위의 결과보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중요한 것이다.

 

키티온의 제논은 그의 아버지처럼 상인으로서 거부가 되었지만, 아테네의 신탁에서 최고의 삶을 얻기 위한 방법을 물었을 때, 무녀로부터 철학을 연구하라는 신탁을 받은 이후로,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 스스로 철학을 공부하면서 스승을 찾고 있었는데, 페니키아에서 아테네로 향하는 무역선을 운행하던 중 난파하여, 간신히 살아서 아테네에 도착하여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크세노폰이 쓴 '회상'(Memorabilia)을 읽게 됩니다.  크세노폰의 회상은 사실상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를 회상하며 쓴 산문집이기 때문에, 크세노폰 본인 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사상 소개가 대부분인 책입니다.  이 책에 푹 빠진 제논은 서점 주인에게 당연히 소크라테스를 생각하며, 이 책에 나오는 사람은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견유학파의 유명한 철학자인 테베의 크라테스를 가리키며 서점주인은 '저 사람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라고 한 것이 인연이 되어 크라테스의 제자로 들어갑니다.  비록 난파를 한번 했다고 하나, 아직도 제논은 상당한 부자였고, 그는 기본적으로 타고난 겸손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견유학파 철학자들의 소위 그 '뻔뻔함'에 쉽게 동화되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크라테스는 렌틸콩 수프 (대표적인 저소득 평민들의 음식)를 가득 담은 냄비를 들고 케라메이코스 (아테네의 마을) 시내를 한바퀴 돌라고 시켰고, 그는 창피한 나머지 냄비로 얼굴을 가리고 숙이며 걸었습니다.  이에, 크라테스가 지팡이를 들어 냄비를 내리쳐 깨버리자, 온통 온몸이 수프에 젖어버렸고, 옆에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도 다 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너무나도 창피하고 당황해서 그는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런 그를 보며 뒤에서 크라테스는 "조그만 페니키아 놈아! 너는 왜 도망가는 거냐? 너에게 얼마나 대단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거냐?"  즉, 이정도의 창피는 굳은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이겨내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이후로도 스승만큼의 '뻔뻔함'을 가지지는 못하긴 했지만, 후에 철학자로서 한 사조를 창시하고 이끌어나가게 되는 제논에게 이 가르침은 분명 큰 정신적 재산이 되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제논의 죽음에 관한 일화

 

제논은 노년까지 제자들을 가르치며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스토아에서 나오다가 넘어져서 발가락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짜증난다는 듯이 주먹으로 땅을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간다. 내가 간다. 왜 나를 부르는가?"

이렇게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즉, 놔두면 내가 알아서 갈건데 왜 나를 하늘로 부르고 난리냐? 라고 위트있게 말한 것입니다. 

그의 사후에 아테네 시민들은 그의 비문에 그를 카드모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니키아의 왕자로 그리스에 알파벳을 가져다준 영웅) 에 비교하며,
카드모스가 그리스에 글을 가져왔다면, 제논은 그리스에 책과 글쓰기 기술을 가져다 주었다. 
라고 칭송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