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1권 중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논쟁 부분
2 라운드 : 트라시마코스
이전 게시물에서는 '올바른 것' 즉, 정의 라는 것에 대한 케팔로스와 폴레마르코스의 각자의 견해와 이를 차례로 불합리함을 지적하여 논파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더라다 정말 소위 갑툭튀로 트라시마코스가 그 자리에 나타나 그가 생각하는 '정의'를 설파하려 한다.
자 이제 구원투수로 트라시마코스가 나섰다. 그는 일단 먼저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질타한다.
"만일 당신이 정말로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질문이 답변보다 쉽다는 점 뒤에 숨어 단순히 질문만 하고, 남이 주는 답을 반박만 하며 청중을 기만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답변을 하세요. 그리고 당신은 과연 무엇을 정의라 이름내리는지 말하십시오."
공자, 노자 등 동양의 많은 선현들의 일화를 읽다보면 사실 나도 트라시마코스처럼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빈정거림의 끝판왕 중 하나인 소크라테스를 만나니 트라시마코스가 어떤 심정일지 이해가 간다.
능구렁이 소크라테스 옹은 다음과 같이 한발빼며 받아칩니다.
"알고 싶은데 말을 못해서 그런 것이고, 몰라서 대답을 못하는 것 뿐이다. 다만, 남들이 말하는 것을 반박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데 그걸 못하게 한다면 내가 할 말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네가 아는 것이 많아 보이니 네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가?"
한발빼는 척 턴을 넘겨버리는 수법에 어쩔 수 없이 트라시마코스가 먼저 '정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힙니다.
"정의란 강자에게만 이익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약자에겐 정의롭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보다 더 이익이 된다. 여기서 강자는 지배자를 의미하고 지배자는 항상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법률을 제정하고 그 법으로 약자를 억압합니다. 법은 곧 정의이므로 결과적으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 아닙니까?"
사실, 과격한 표현이긴 해도 대놓고 틀렸다고 하기에는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긴 하니...
케팔로스의 ‘정직과 채무의 이행’이나 폴레마르코스의 ‘합당한 보상’이 개인들 간에 지켜야할 규범이나 원칙과 같은 성 격의 것인데 비해서, 트라시마코스의 ‘강자의 이익’은 국가 차원 의 정의 개념입니다. 트라시마코스가 ‘정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법 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고,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은 ‘정치권력을 쥔 강자(통치자)가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만든 법을 약자가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의라는 주장의 약식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의의 주체는 법을 따르는 약자이며, 강자의 편에서는 자신에게는 이익이 되나 약자에게는 해가 되도록 법을 만들거나, 만들어진 법을 마음대로 어기는 행위, 즉 ‘불의를 행하는 것’이 된다. 결국 정의와 불의는 강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궤변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반박합니다.
"올바른 것이 편익이 되는 것이라는 점은 동의하나 다른 것은 좀 더 검토해 보아야 하겠네. 자네가 지금 말한 통치자들은 전혀 실수를 하지 않는 자들인지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자들인가?"
어쩔 수 없이 트라시마코스는 실수할 수도 있는 자들이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다음과 같이 다시 말을 이어갑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은 그들이 옳게 법을 제정하고 어떤 것은 옳지 못하게 제정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그들이 옳게 제정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편익이 되는 것들을 제정하는 것이겠지만, 실수로 옳지 못하게 제정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편익이 못 되는 것들을 제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그 법을 지킨다는 것은) 통치자의 편익뿐만 아니라, 편익이 못 되는 것도 이행하게 되는 것이 올바른 것 (정의) 이 되지 않겠는가?"
현실주의자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의 궤변에 소크라테스 역시 위와 같은 궤변으로 맞섭니다.
트라시마코스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결국 자신의 가정이 일부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고 가정 자체를 바꿉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를 저지를 때, 그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강한자로 부를 수가 없습니다. 엄밀한 뜻으로 말한다면 어떤 전문가도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그가 통치자인 한에 있어서는, 실수하지 않으며 실수를 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것을 제정하게 될 것이고, 다스림을 받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이행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올바름 (정의) 은 강한자의 편익이라는 것이 정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엄밀한 의미 (akribē logon) 의 강자" 가정입니다.
이에대해 소크라테스는 다음의 논리로 맞섭니다.
"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강자는 자신을 위해 최선의 것을 제정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것 자체가 강자가 가진 자신의 기술이고, 강자에게 이익을 주는 기술이란 무엇이겠는가? 기술이란 사실 본성적으로 자신에게도 득이 되겠으나, 대부분 기술이 행해지는 사람들에게 더 큰 이익이 되는 것이 사실 아닌가?
가령 의술은 본래는 의사보다는 환자에게 더 큰 이익이 되는 행위 아닌가? 전문적 기술은 반드시 통치자나 전문가 같은 강자의 이익만이 되지는 않지 않은가? 진정한 의사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고, 진정한 선장은 승객의 안전을 돌보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통치자는 통치받는 시민들을 이롭게 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논리가 격파당하자 이번엔 트라시마코스가 "현실의 강자" 를 설파한다.
"그건 선생께서 양을 치는 이들이나 소를 치는 이들이 양이나 소한테 좋은 것을 생각하며 이것들을 살찌게 하고 돌보는 것이 주인한테 그리고 자신들한테 좋은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염두에 두어서라고 생각하시니까 하는 말입니다. 더더구나 선생께선 나라들에 있어서 통치자들이, 즉 참된 뜻에 있어서 통치를 하는 이들이 다스림을 받는 이들에 대해서 마음 쓰는 것이,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양들을 대할 때와는, 그래도 어떻게든 다른 데가 있다고 생각하시며, 따라서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이득을 보게 될 것과는 그래도 다른 어떤 것을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믿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께선 정의로운 것(to dikaion)과 정의(dikaiosynē),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것(to adikon)과 부정의(adikia)에 관해서도 이처럼 캄캄한 터여서, 이런 사실조차도 모르고 계실 정도입니다."
즉, 양치기들이 양을 치는 것은 양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선 사실 자신들을 위해서 양들을 살찌워서 나중에 자신들이 먹거나, 비싼 값에 팔기 위함인 것처럼 현실의 통치자들은 시민들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시민들에게 좋아'보이는' 정치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이것에 대해 현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 이면 또한 고려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술은 건강을 제공하고 건축술은 집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모든 기술은 각 대상을 이롭게 한다.
물론 기술을 통해 기술자는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기술은 유상으로 이루어지든 또는 무상으로 이루어지든 그 대상에게도 이익을 줄 수밖에 없다.
즉 기술은 기술을 가진 사람(강자)에게만 항상 이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이전 자신의 주장을 한번 더 강조한 모양새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트라시마코스가 이념적인 정의의 이중성을 강조한다.
극도의 현실주의적 소피스트다운 발언이다.
"일상생활에서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보다 어떤 경우에나 덜 가집니다. 계약을 맺었다가 해지할 때에 그렇고, 세금 납부에서 그렇고, 공직을 수행할 때도 제 집안일을 소홀히 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며, 친척들에게 부당한 도움을 주려하지 않다 보면 미움을 사는 일도 있습니다. 정의와 정의로운 것이란 실은 ‘남에게 좋은 것’, 즉 더 강한 자와 통치자의 편익이되, 복종하며 섬기는 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인 반면에, ‘정의롭지 못함’은 그 반대의 것이어서, 참으로 순진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조종하거니와,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저 강한 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하여, 그를 섬기며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결코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말씀입니다.
선생께서 무엇보다도 제일 쉽게 이것을 이해하시게 되는 것은, 가장 완벽한 상태의 부정의에 생각이 미치실 경우일 것입니다. 그건 부정의 한 짓을 한 자를 가장 행복하도록 만들지만, 반면에 그걸 당한 자들이나 부정의 한 짓이라곤 아예 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을 가장 비참하게끔 만드는 그런 것입니다.
강자의 논리가 통하는 현실에서 힘은 클수록 유리합니다. 힘 있는 자가 이익을 보고 행복을 누리는 단적인 예는 참주와 같은 절대 권력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소한 부정의를 행할 능력밖에 없는 자는 잘못하면 발각되어 처벌받고 비난 받지만, 그런 처벌과 비난까지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절대 권력자는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행복한 자로 불립니다. 약자들이 불의를 비난하는 것은 실은 불의 자체를 꺼려서가 아니라 사실 그로 인한 피해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지금 현대사람의 입장에서 읽어봐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여기까지 듣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크라테스 옹은 마지막으로 자신도 자신의 이념을 설파합니다.
"궁극적으로 올바르지 않게 사는 것은 오히려 불이익이 된다. 우리는 당장 부정한 짓을 저질러 눈앞에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부정한 짓을 저지른다고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내 육신에 이익이 될 수는 있지만 내 영혼에는 불이익이 될 수 있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 아닌 약자의 이익이다. 즉 진실한 지배자 (통치자) 는 자신의 이익이 아닌, 피지배자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리고 바른 사람은 선하고 지혜가 있지만, 부정한 자는 지혜가 없고 약하며, 따라서 정의는 지혜이자 덕이므로 부정보다 강력하여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제 이익에만 마음 쏟는 이는 이름만 통치자일 뿐, 실제는 강도일 뿐.
만약 의사가 환자를 위하는 마음보다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교묘하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가 의사인가? 의사의 탈을 쓴 강도가 아닌가?
통치자나 정치가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들이 통치를 받는 사람들의 행복과 정의를 위해 법을 세우고 집행하기보다는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데에 더 마음을 둔다면, 그들은 진정 통치자도, 정치가도 아니다.
그런 가죽을 쓴 가장 위험한 강도다.
정의는 훌륭한 사람의 미덕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그 영혼이 참된 앎과 진정한 용기, 절제로 조화를 이루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정의로운 국가를 꾸리며 모두의 행복에 힘쓴다."
솔직히 크게 동의하기 힘든 소크라테스의 스스로의 이상론 같아 보이긴 하지만, 그리스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실체적 존재" 라는 의미에서 볼 때, 이미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통치하는 통치자라면 이는 이미 존재의 의미가 '통치자'가 아닌 '강도' 의 범주로 변질되었고, 그 기준에서 다시 정의를 판단해야 한다는 뜻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뭔가 어중간하게 끝난거 같긴 하지만, 이 정도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승리'! 를 선언한다.
뭐 플라톤 국가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트라시마코스가 자신의 '패배'? 를 순순히 인정했을 지는 의문이다.
나중에 좀 뒤에 가면 글라우콘과의 대화가 이 내용에 첨가해서 이어지지만, 그 내용은 차후 글라우콘이나 플라톤을 다룰 때 이야기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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